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무덤은 북한 개성 근교에 있다. 고려 왕릉 가운데 유일한 부부 쌍릉이다.
입력 : 2020-04-14 00:08
고려 공민왕은 그림과 서예 실력이 당대 최고라 꼽힐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왕비인 원나라 노국대장공주를 매우 사랑했지만, 난산으로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는다. 노국대장공주가 임신했다는 사실 등을 볼 때 공민왕도 처음엔 이성애자였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부인과 사별한 충격을 못 이기고 점차 난잡한 성애를 추구하다 결국 동성애자가 된다. 급기야 공민왕은 1373년 10월 1일 고려의 미소년들을 모아 자제위라는 동성애 단체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홍륜 한안 권진 홍관 노선 등 고려 최고의 꽃미남들이 속해 있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 시기 공민왕은 여성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 철저한 동성애자로 산 것으로 전해진다. 공민왕이 스스로 여성처럼 화장하는 것을 즐겼다는 정황으로 볼 때, 남성 간 성행위 때 자제위 소속 청년들에게 자신을 제공하는 여성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은 자제위 청년들에게 많은 재물과 권력을 주고 아꼈는데, 그중에서도 홍륜을 가장 총애했다. 공민왕이 동성애자가 되니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왕가를 이을 후사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공민왕은 고민 끝에 엽기적인 제안을 한다. 가장 아끼는 동성 간 성행위 상대자인 홍륜이 왕비들과 잠자리를 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계획이 추진되자 왕비 중에 정비 혜비 신비는 따를 수 없다며 자결을 시도한다. 익비는 칼을 들이댄 공민왕의 폭압에 못 이겨 목숨을 부지하고자 홍륜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이후에도 왕의 지시에 따라 홍륜의 성폭행은 계속되고 익비는 결국 홍륜의 아이를 갖게 된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동성애 성중독이 도덕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동성 간 성행위에 함몰되면 단순히 쾌락을 느끼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성도덕의 가치가 무너지고 도덕적 경계선도 함께 허물어진다.
공민왕은 1374년 10월 내시 최만생에게 익비의 임신 소식을 듣는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홍륜과 익비의 아이를 왕손으로 삼아 왕권을 유지하려 한다. 내시 최만생에게 “왕은 비밀을 나누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인 너와 홍륜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며 신변을 정리한 후 자결할 것을 명령한다. 최만생은 부도덕한 공민왕을 위해 죽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살고 싶은 생각에 바로 홍륜을 찾아가 왕이 기밀 유지를 위해 홍륜을 곧 살해할 것이라고 알린다. 홍륜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제위 청년들과 함께 공민왕의 침실로 가서 칼을 휘두른다. 자제위 청년 수십명에게 자기 몸을 제공하던 왕은 더 이상 그들에게 신성한 존재가 아니었다. 만취 상태였던 공민왕은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44세의 나이에 눈을 감는다. 자제위 청년들은 누더기가 된 공민왕의 시신을 저잣거리에 매달았다.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원나라도 14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민왕 재위 기간인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고 원나라는 만리장성 이북으로 쫓겨간다.
공민왕은 동성애자가 되기 전에는 훌륭한 왕이었다. 원나라가 함경남도 화주에 설치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잃었던 땅을 회복했다. 공민왕이 동성애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불세출의 맹장이었던 최영을 앞세워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무덤을 직접 설계했는데, 공사 기간만 1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 능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평가받는다. 공민왕의 사례는 아름다운 사랑을 한 이성애자라 할지라도 동성애 성중독에 빠지면 패가망신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보여준다.
염안섭 수동연세요양병원장
정리=백상현 기자
[출처] - 국민일보